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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Henri Marisse, 1869-1954)는 20세기 표현주의 프랑스 화가이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대의 화가로 꼽힌다. 

이 두 작품은 갤러리가 아닌 5층과 6층 사이의 계단 벽에 걸려 있다.

어째서 거장의 불후의 명작을 전시실이 아닌 관람객들의 발길이 뜸한 계단 벽에다 걸어놓은 것일까. 잠시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사연을 들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춤〉은 처음부터 계단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거상이자 19, 20세기 미술 컬렉터였던 세르게이 시추킨은 마티스에게 모스크바 저택의 계단을 장식할 두 점의 패널화를 의뢰했다.

작품 제작을 위해 마티스는 1910년 러시아를 방문했고, 러시아 전통 미술인 이콘화의 단순함과 위대함에 큰 감동을 받아 두 점의 대작을 완성했다.

이 작품이 그 유명한 〈춤〉과 〈음악〉이다.

​춤(Dance, 1909)

음악(Music, 1907)

이외에 모마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붉은작업실(The Red Studio, 1908)

책읽는 소녀(Girl Reading, 1905-06)

푸른 창문(The Blue Window, 1913)

피아노 레슨(The Piano Lesson, 1916)

모로코 사람들(The Moroccans, 1915-16)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스페인 말라가에서 출생하였고 주로 프랑스에서 미술활동을 한 20세기의 대표적 서양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큐비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친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 화가로 관립 미술학교 교사였고 피카소는 모친 마리아의 성()을 계승하였다.

14세에 집안은 바르셀로나로 옮겨 갔으며, 피카소는 부친이 교편을 잡고 있던 그 곳 미술학교에서 배웠다


1901년부터 4년 동안 피카소는 파리와 양친이 있는 바르셀로나를 왕래하면서 사회의 패잔자(敗殘者), 뒷거리의 영락한 사람들, 노인, 고독자 등의 인간상을 화면에 포착하였다.

그러나 결코 기지와 풍자를 쓰지 않고 대상에 충분한 공감을 가지고 그렸던 것이다.

이 시대의 작품에는 <애정>, <늙은 유대인>, <다림질하는 여인> 등이 유명하다.

 

1904-1906년 피카소는 이른바 '장밋빛 시대'를 맞는다.

피카소는 몽마르트르의 아파트 '바토 라보아르(洗濯船)' (시인 막스 자콥의 명명)에 거처를 정하고 친구와 연인도 사귀게 되어 시야를 내면에서 외면으로 넓혀 갔다.

오늘날 그것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과는 달리 스페인 화풍이 아니라 프랑스 화풍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년의 기간 동안 피카소는 전과는 달리 붉은 색과 분홍 색을 많이 사용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가 많은 그림들의 주제로 삼았던 페르낭드 올리비에와의 로맨스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는 서커스에도 흥미가 있어 <공을 타는 소녀> <아를퀴앵의 가족> 등 유랑하는 연예인을 많이 대상으로 하였다.

유명한 동판화 <살탐방크>(16, 1913년 출판)의 제작도 거의 이 무렵이었다.

 

1920년 드디어 신고전주의의 앵글을 생각하게 하는 화풍(畵風)을 택했던 것이다.

이 이후의 3년간을 피카소의 '신고전파 시대'라 한다.

아내인 오르가와 장남 폴을 모델로 한 '모자(母子)' 시리즈는 이 시기의 작품으로서 유명하다.

1924년에는 다시 화면구성을 주로 하는 대정물(大靜物) 시리즈에 착수하였는가 하면 다음 1925년에는 환상·기괴의 표현으로 등장한 쉬르레알리즘 운동에 관여했다.

또한 1930년에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보(變身譜)>와 발자크의 <알려지지 않는 걸작>에 고전주의적 수법인 동판화(銅版畵)에 의한 삽화를 그렸다.

1934년 피카소는 장기간 모국에 머물렀다. 이 체재의 선물로서 그는 그 해에 많은 투우도(鬪牛圖)를 그렸다.

1950년대부터는 걸쳐서는 벨라스케스, 들라크루아, 크라나하, 마네, 다비드 등의 명작과 대결하여 이것을 자기의 양식화(樣式化)한 독특한 모작(模作)에서 새로운 진로를 추구하였다.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피카소는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였지만프랑스 정부에서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 프랑스 시민권을 갖지는 못했다.

피카소는 스탈린을 익살스럽게 그린 그림이 스탈린에 대한 조롱으로 해석되어 1957년에 제명되기까지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자였으며한국 전쟁에서 벌어진 미국의 잔학행위(:미군이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한국인들을 전투기와 기관총으로 학살한 노근리 학살)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1951년 그는 한국에서의 학살을 발표하였고, 유엔과 미국의 한국전쟁의 개입을 반대하였다.

1973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피카소는 1 3,500여 점의 그림과 700여 점의 조각품을 창작했다.

그의 작품 수를 전부 합치면 3만여 점이 된다.

피카소 작품의 개수와 다양성 때문에 많은 예술사가들이 그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시도해왔다.

하지만 각 시기의 명칭을 정하고 시기를 몇 개로 나눌 것 인가를 놓고 계속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모마 컬렉션 가운데 하이라이트로 꼽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알프레드 바가 1937년부터 1938년까지 2년에 걸쳐 공을 들인 끝에 소장하게 된 작품이다.

1939년 미술관에 들여온 〈아비뇽의 처녀들〉은 입체파의 도래를 알리는 걸작으로뉴욕 현대미술관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린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여성의 신세를 심하게 왜곡시키고 얼굴을 가면처럼 그려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얼굴을 가면처럼 그린 것은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연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묘사된 여인들은 전통적인 아름다운 여성상이 아니라 바로 그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매춘부들이다. 

이 작품 외에 

만돌린 켜는 소녀(Girl with Mandolin. 1910)

세 악사(Three Musicians, 1921)

석고상이 있는 화실(Studio with plaster head, 1925)

​거울 앞의 소녀(Girl Before a Mirror, 1937)

그림 그리는 소녀와 인테리어(Interior with a Girl Drawing, 1935)

앙티브의 밤낚시(Night Fishing at Antibes, 1939)

머리를 땋고 있는 여인 (Woman plaiting her hair, 1906),  휴식(Repose, 19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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