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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작품 소개

오퀴트 로뎅(Augusre Rodin, 1804~1917) _ 발자크 동상(Monument to Balzac, 1898)

모마 1층 창가에 전시 되어 있는 이 조각상은 프랑스의 작가 발자크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석고로 완성됐을 당시에는 거칠고 투박한 모습에 혹평을 받았지만 로뎅은 이 작품을 위해 7년간 빌자크의 삶과 작품에 대해서 연구 했고, 발자크의 삶과 이념 내면을 묘사하고자 해던 로뎅은 스스로 이 작품을 완성하고 조각가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했다.

첫 작품은 파리 로뎅 미술관에 있으며, 추가로 주조된 것들은 세계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 등이 있다.

 

로뎅의 예술과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까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이다.  

15년간 로뎅의 곁을 지친 뮤즈였지만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로뎅의 그늘에 가려 주목 받지 못한 비운의 조각가이다.

그녀의 남다른 재능을 눈여겨본 아버지의 지원으로 17세 때 아카데미 콜라로시에 진학하여 조각가 알프레드 바우처로부터 조각을 배웠으며 그의 친구였던 로뎅을 만나게 된다.

1883년 처음 로뎅을 만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19살이었다.

로뎅은 이미 43살의 중년이었고 20여년을 함께 살아온 실질적 아내가 있는 상태였다.

24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곧 연인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카미유는 로뎅의 완전한 사랑을 받고 싶어 했으나 로뎅은 부인인 마리 로즈 뵈레와 헤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타고난 예술가였고 독창적인 결과물을 내놓고 작가로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로뎅과의 관계는 소원해져 갔다.

10여년을 함께 창작에 몰두했지만 카미유의 이름으로 남은 작품은 얼마 없었다.

1898, 살롱전에 출품했던 카미유의 작품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들은 완전히 결별한다.

이때부터 카미유는 로뎅이 자신의 작품을 훔치려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게 되고 1913년 카미유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가족들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린다.

이후 카미유는 79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무려 30여년간을 그곳에서 갇혀 지내게 된다



나는 빈센트 반고흐를 좋아한다. 

이번 주요 작품 소개에 반고흐의 내용이 많은걸 이해해주길 바란다. 

반고흐가 누군지 잘 모른다면, 러빙 빈센트라는 영화를 보면 이해가 빠르다.

미술계에서 가장 독보적인 비운의 천재이자 현재미술의 아버지. Vincent Willem van Gogh (빈센트 반 고흐)

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

어린시절

목사 테오도뤼스 반 고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흥미롭게도 고흐에게는 태어나기 전에 죽은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의 이름도 빈센트였다. 

그의 형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흐는 살면서 죽은 형을 대신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고 한다. 

사산된 형처럼 여긴 가족을 위해 기대에 부응하며 살기위해 노력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고흐는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살았다고 한다.


1876년 빈센트는 큰아버지의 미술품 상점에 들어갔다가 유난히 미술의 관점에 대해 손님과 논쟁을 자주 벌였던 탓에 그는 화랑에서 해고된다... 라고 알려진 게 일반적이지만, 

사실 이때의 일을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기 힘들며 그 바탕에는 상당히 복잡한 뒷배경이 숨어있다. 

전도 유망한 화상의 길을 가고 있던 고흐는 구필 화랑의 런던지점을 내기 위해서 런던에 파견되었으나 고도로 산업이 발전한 런던에서 본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충격과 하숙집 주인의 딸인 외제니 로예를 사랑했지만 실연을 당하게 된 아픔이 겹치면서 일이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에 고흐의 일평생을 괴롭히게 되는 정신적인 증세도 영향을 끼쳤다. 

앞서 말한 노동자의 현실에 충격을 받아, 훌륭한 그림을 보호하고 작가를 후원하는 이상적인 방식이 아닌 크게 가치 없는 그림이라도 돈을 위해 감언이설로 팔아야 하는 화상의 생활방식에 염증을 느끼게 됐다는 견해도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회를 갔지만 목사 시험이 너무 어려워 그나마 수월한 선교사가 되었지만 그마저도 다시 찾아온 조울증으로 그만두게 된다.

아들이 광신적인 목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아버지는 다시금 형 센트에게 도움을 구해서 센트는 빈센트를 위해 로테르담 근처의 도르트레흐트 근처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브라트에게 부탁해 서점에 일자리를 얻어주었다. 

하지만 그 일마저도 흥미가 사라지면서 일자리에서 쫓겨난다. 

서점 일에서 쫓겨난 것으로 빈센트와 큰아버지 센트와의 인연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빈센트는 28살 나이에 차음 붓을 잡았고 테오의 도움으로 계속 그림을 그릴수 있었다.

8년만에 아마추어에서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성장했다.

모네, 투루루즈, 시냐크, 베르나르드, 마네 예술에 대란 모든 게 시작인 파리로 왔다.

모네는 빈센트를 독립예술가 협회의 빛나는 스타로 선언했다.


아를에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그는 아는 화가들에게 모두 편지를 써보내서 화가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런 제안에 응했던 사람은 유일하게 폴 고갱 정도였다. 

사실 고갱 입장에서는 이 제안이 나쁠게 없었는데 고흐의 동생인 테오가 생활비를 대주는 식이었기 때문에 늘 돈때문에 시달리던 고갱에게도 공동생활은 나쁘지 않을 듯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성격 차이와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로 처음부터 이 공동생활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고흐는 밀레의 영향을 받아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좋아한 반면에 고갱은 기억에 의존해서 창의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런 두 사람의 관점 차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아를에서 고흐가 친하게 지낸 카페 여주인 지누의 초상화였다. 


고갱이 온지 두달이 약간 지난 1888년 12월 23일,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고갱의 회고에 의하면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며 나타나서 자신을 찌를듯 해보였지만 노려보기만 하고서는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 뒤에 귀를 잘라버린 걸로 보이며 잘라낸 걸 가끔 만나던 사이인 라셸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었고 그걸 보고 기겁한 라셸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반고흐가 귀를 짜르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1. 고갱의 회고가 맞다면 고갱을 찔러버릴 의도였지만 생각을 바꿔 자신의 귓불을 잘라버렸다는 설.

2. 정신과적인 분석에 의하면 자신의 신체를 자르라는 명령적인 환청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설.

3. 투우에서는 소의 귀를 자르는게 승리의 표상으로 여겨진다고 하는데 고흐가 어쩌면 고갱의 압박이라는 것을 벗어나려는 차원에서 고갱을 찌르려다 생각을 돌이켜서 자신의 귀를 잘랐고 그것으로 고갱의 압박에서 벗어나 승리했다는 상징이 아니었을것이라는 설.

4. 테오의 결혼에 충격을 받아 귀를 잘랐다는 설.

5. 아를 시절, 뜨거운 햇볕 아래서 모자도 안 쓰고 그림을 그리던 게 정신병 원인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6. 압생트를 많이 들이켜마시며 스스로 망가진 것도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7. 90년대에 나온 국내 위인전에서는 주로 고갱이 그린 고흐의 그림과 연결시켜서 '내 귀는 이렇게 안 생겼어!' 라고 주장하려는 목적으로 귀를 잘라서 그림과 나란히 대조해서 보여주려고 했다는 설도 있다.

8. 2009년 고흐의 귀는 사실 폴 고갱이 펜싱검으로 잘라냈다는 주장이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에 보도되었고, 2011년 TV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내용이 방영되었다.


빈센트 반고흐가 죽은 이유의 여러가지 설이 있다.

1. 빈센트와 테오 두 형제의 죽음에 매독이 연루되었다는 주장.

2. 자살이 아닌 살해당했다는 의견

3. 일본의 한 고흐 연구가는 고갱이 고흐를 죽였다라는 주장도 했으며. 

4. 고흐가 중상을 입고 왔을때 가셰가 총알을 적출하는 외과 수술을 받게 했다면 살수도 있었지만 외과 수술 반대론자였던 가셰가 외과 수술을 받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 

이것은 영화 러빙빈센트에서 다뤘다.

빈센트 반고흐가 죽기전에 테오 반고흐에게 쓴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우체부이자 빈센트의 친구 조셉 룰랭의 아들 아르망 룰랭이 편지를 전달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

아버지를 대신하여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아들은 오베르로 향했다.

파리를 방문중인 가셰박사를 기다리며 빈센트가 머문 라부여관에서 머물며 가셰박사를 기다렸다.

빈센트와 마르그리트(가셰 박사의 딸)가 아주 가까운 사이였고, 그녀는 죽기전까지 미혼으로 아버지의 집에서 살았다.

빈센트가 그린 그녀의 피아노 치는 모습은 44년 동안 그녀의 침실에 걸려 있었다.

편지는 가셰박사에게 전달했고 가셰 박사는 테오의 미망인 조에게 전달 되었다.

5. 사망 전 18개월 동안 조울증이나 경계성 장애를 앓고 있었으며 이런 증상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살에 이르게 됐을 것이라는 설.


고흐은 8년동안 800점의 작품을 남겼고 그의 생전에 단 한 점이 팔렸다.


테오

고흐가 태어난 지 2년 후에 여동생 안나가 태어났고 그로부터 다시 2년 후에 고흐의 평생 친구이자 동반자가 된 남동생 테오가 바로 이때 태어났다.

동생인 테오를 너무나 아껴 테오가 결혼할 때 가족들이 그 사실을 고흐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고흐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는 세 번이나 졸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로 테오의 아내와 그 아이도 많이 사랑했으며 고흐는 대체로 테오의 가족과는 사이가 좋았다고. 

그러나 정작 자신의 가족들 중에선 자신을 이해해 정신적, 물질적으로 도움을 줬던 바로 아래 동생 테오와 자신과 같이 예술가의 길을 가려는 작가 지망생 여동생 윌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다른 형제 자매들과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빈센트가 권총으로 자살 한 후 매독 3기를 앓던 태오도 6개월 후 죽었다.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1889)

5층에 위치한 이 작품이 모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회오리 치는 밤하늘과 대비된 고요한 대지 사이에는 고흐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하늘을 향해 타오르고 있다

​반고흐는 자연을 재구성하지 않고 사물의 특성을 과장되게 부각하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곤 했다.

이 작품은 고갱과의 불화로 스스로 귀를 자른 뒤 프랑스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요양하던 중 창밖으로 보이는 마을 풍경을 그린 것이다.

화면은 녹색과 파란색이 주조로 무거우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준다.

그에 반해 더욱 격렬해진 필치와 충동적인 붓질로 인해 표현주의적 성격을 더한다.

<별이 빛나는 밤>은 자연에 대한 고흐의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한 작품으로 당시 고흐의 심리적 상태를 잘 드러내고 있다.

37년 짧은 삶을 산 빈센트는 오랜 우회의 길을 걷다가 27세가 되던 1880년에야 화가의 길에 들어 불과 10년의 작품생활을 했지만 숱한 명작을 남겼다.

이 작품 외에 모마에는 우편배달부 조셉 룰랭의 초상화(Portrait of Joceph Roulin, 1888), 올리브 나무들(The Olive Trees, 1889)이 있다.


반 고흐가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인 아를에 도착했을 1888년에는 이탈리아인이 자국민을 살해한 사건으로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이 심했다.

괴팍한 성격을 지닌 네덜란드 출생 화가 반고흐 역시 피해야할 대상이였지만 조셉 룰랭은 반고흐의 손을 잡아 주었다.

조셉 룰랭은 반고흐 보다 12살 많은 형이자 우편물을 분류하는 책임자였.

종종 반고흐를 자신의 지븡로 초대해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그의 가족과도 모두 가깝게 지냈다.

아를 체류 당시의 반 고흐가 남긴 이물화의 대부분이 롤랭 가족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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